위암 4기, 암이 사라졌다.
수술 포기하고 자연산 약초를 수없이 많이 복용했습니다.
난 이글이 암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들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 생에 애착을 갖기 바라는 마음에서
지난날의 아버님이 지내오신 날들을 더듬어 적어본다..
악성종양.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난 그때 전북 익산에서 화물차량을 운행 중에 있었다.
며칠 전부터 속이 미식거리고 구토 증상이 있었으나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평소처럼 일을 하고 했으나 속으로는 심상치 않음을 짐작했었다.
어머님의 간곡한 권유에 못 이겨
밭에서 오전을 보낸 후 밀양시의 모병원에서 진찰을 해본 결과
빨리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진찰 소견서와 사진을 주시면서
악성종양인 것 같다는 것이다.
어머님은 어찌할 줄을 몰라
자식들에게 알렸고 나에게 연락이 온 것이었다.
두 분 모두 나이가 연로하신데
어느 정도 예감은 했었지만 갑자기 전화가 받으니까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온몸에서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 들었다.
인생은 한번 와서 가기 마련이지만
그렇게 정정하시든 분의 결말이 이렇게 허망하게 될 줄이랴.
팔십을 바라보시는 나이에도
나보다도 지게를 잘 지시고 경운기를 몰고 일을 많이 하시든 분인데.
자식들을 위해서 아직도 고생을 하시고
편하게 여생을 보내지도 못하시고 저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자식 된 도리로서 지금껏 아무것도 해드린 것도 없다는 것이
죄스럽기만 하고 가슴이 찢어진다.
암이란 최후까지도 고통이 떠나지 않으며
몸부림치는 모습을 생각하니 왜 내가 고쳐드리지 못하나 원망이 된다.
평소에 식사며 건강해 보이시든 분이
어느 날인가 기운이 없어 보이시고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어머님은 보시고 진찰이라도 한번 받아 보라고 권유했지만
고집이 센 아버지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버럭 화를 내면서 음료수잔에 소주를 가득 부어 냉수 마시듯 들이켜마시셨다.
나이가 있는 관계로
얼마 전부터 술의 힘을 빌려서 일을 하시는 모양이시다.
당신은 말씀은 안 했지만 무척이나 힘드신 생활이 아닌가.
이곳은 지역특성상 생산되는 것은
대추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런 척박한 곳이다.
이십여 년 전 만해도 값이 좋았는데
지금은 수입산 및 대량생산으로 인하여 말이 아니다.
이 대추로 우리 4남매를 키워내셨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두 분은 밭에서 새벽부터 대추를 따고 계셨다.
대추 따기가 보기와는 달리 쉬운 일이 아니다.
고개를 쳐들고 긴장대로 요령껏 대추를 때려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아버지가 보이지 않아 찾아보니 밭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구토를 하고 있지 않는가.
어머님은 놀라서 빨리 병원에 가보자고 했으나
내일 모라면 추석인데 추석이나 지내고 간다고 고집을 부리신다.
원래 고집이 센 분이라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치겠는데
아무래도 일하시는 모습이 평소와 같지가 않아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손목을 끌면서 병원에 찾았던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가기 싫은 병원을
억지로 끌고서 갔으니 싸우기 마련이었지만
늘 이기시는 건 어머님이시다.
사실 말이지만 아버지는 술고래에다 담배까지 드시니
동네에서도 알만한 사람을 훤히 알고 있는 일이다.
담배는 그리 많이 피우시는 편은 아니지만
술을 없어 못 마실 분이라 일을 할 때면 술병을 달고 살았으니까.
하루에 소주를 안주도 없이 두 되는 족히 마셔 서리라.
모든 것이 유전이 아닌지 의심이 간다.
할아버지도 살아생전에 술과 담배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는데 말이다.
어릴 적에 할아버지는 시골의 사돈댁에 아침 일찍
비료포대를 둘러메고 잎 답배를 몇 포대씩을 얻어 와서
온방이 노랗도록 피우시든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술도 마찬가지였다.
임종의 순간에도 물은 안 받아들이셔도 술은 받아들이시던 분이 아니신가.
그런 유전일 수밖에.
아마 아버지께서도 양으로 계산하면
몇 차는 마셨으리라는 것을 자신도 알고 계시다.
언젠가 간 기능 검사를 해본 결과 지방간이라는 판정을 받고
술을 삼가했으면 좋겠다고 했으나
처음은 듣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계속 마시셨든 그런 분이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자주 다투기도 했고
나에게 재발 술좀 못 먹게 하라고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까지 하셨지만 허사였다.
모든 것은 본인이 결심을 하지 않고는 되지 않는 법.
주위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평소의 습관 되로 생활을 하고 지내시든 분이시다.
도시에서 생활한지도 어언 이십 년이 다 되어 가는 나로서는
자주 들리지는 못하지만 항상 소식은 듣고 있는 터라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항상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몇 년 전에는
어머님이 뇌졸중 증상을 보여서 병원에 모셔온 기억이 생각난다.
다행히 한방으로 정상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왜냐면 아직도 노구를 이끌고 일을 하고 계시니까 말이다.
동생들과 의논을 해서 부산의 동아대병원에 입원을 해
정밀 진찰을 받기로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의 암환자들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드디어 예약 날자가 다가오고 정밀검사를 받았다.
가족들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암이 아니길 바라면서 진찰 결과만을 기다린다.
며칠 지나 의사는 가족들을 불러서
현재의 환자상태로는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암 4기로 다른 부위에 전이가 되기 전에 제거하자는 것이다.
순간 난 하늘이 캄캄했다.
드디어 나도 암환자의 가족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과
투병으로 몸부림치는 환자일 모습들을 자주 보아온 터라
그저 멍하기만 했다.
그러나 별수가 없었다.
수술하기로 결정을 하고 수술 날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4기면 위암 말기나 다름이 없는데
수술을 하면 생명의 연장은 가능할까.
항암치료며 방사선 치료는 견디어 내실까.
중간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등등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난 며칠을 생각한 끝에 동생들과 상의를 해서
수술을 하는 것이 마지막 효도인 줄 알지만 수술을 안 하기로 결정했다.
불효 일지는 몰라도 말기 암이라
수술을 한다고 하더라도 생명의 연장에는 도움이 안 될 것 같고
오히려 고통만 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차라리 그렇다면 그 수술할 비용으로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등 당신이 마지막으로 하고픈 것을
하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본인이 수술을 하겠다면
어쩔 수가 없는 법이라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자식 된 도리로서 수술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나의 물음에 아버지는 번복을 하셨다.
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의사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니까 의사는 좀 불쾌한 모양이다.
수술이 잘되고 못되고를 떠나
병원도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지 않는가.
환자의 거부의사에 의사는 복강경으로 수술을 하면
간단하면서도 수술 후유증도 적어
개복이 어려운 환자에게는 좋은 방법이라
비용은 좀 비싸지만 권유할만한 방법이라고 수술을 유도한다.
의사의 설명에 아버지는 했으면 하는 눈치였으나
이번에는 한사코 어머니가 반대이시다.
어머니는 살만큼 살았는데 수술한다고 더 산다는 보장도 없고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고생만 시킨다고 적극적으로 반대이시다.
한 사람의 생명을 놓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마지막 효도를 하는 것인지 도모지 결정이 되지 않는다.
얼마 후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수술은 하지 않는다고.
"나도 살만큼 살았고 수술한다고 더 살 것도 아니고
수술한다면 이 나이에 일어나기는 틀렸다" 고 하신다.
수술할 돈으로 맛있는 것이나 먹겠다고 하신다.
의사는 환자의 뜻에 따르기는 하나, 내심 눈치가 좋지를 않다.
난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구입하고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몇 가구 안 되는 시골 동네에 난리다.
아버지가 무슨 당장 죽는 사람인 양
마지막 모습이라도 한번 볼 양으로
모두가 병문안을 오고 무슨 약이 좋다더라는 등 이야기가 난무하다.
모든 동네분들의 위로에 말씀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그리고 이제 얼마 남았을지 모르는 여생을
민방으로 다스리기로 결정을 하고 암에 대한 책이며
좋은 약이며 주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인터넷을 뒤져 암을 이긴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며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무엇인지 세밀하게 알아보았다.
그것의 공통된 특징은 술과 담배일 안 하는 것과
육식을 금하고 채식 위주의 식단.
그리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근심 걱정을 버리고
환자 자신이 삶에 애착을 가지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술이며 담배를 끊는다는 것이
고통이기는 하지마는 살기 위해서는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던 참에 집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폐암으로 진단을 받고 민방으로 고쳤다는 한 어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반신반의하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방법을 구했다.
그분은 보기에도 환자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가 않았고
건강하게 90 노모를 모시고 계셨다.
자신의 투병 담을 이야기하며
완쾌되기를 바란다면서 꾸지뽕나무의 기름을 주셨다.
이것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조 금씩 먹으라고 하시면서.
그리고 꾸지뽕나무를 구해서 삶아서
그 물을 음료수 먹듯이 마시라는 것이다.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먹는데 그리 불편한 것도 없는데 단지
자주 먹음으로 인하여 불 냄새가 심하게 난다는 것이다.
어느 날은 너무 많이 먹다가 심한 고통을 받기도 했다.
암 판정을 받은 후부터는 식단이 완전히 달라졌다.
모든 것이 입에 맞지가 않았으나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몸에 좋은 것은 입에 쓰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 외에도 민들,레 신냉이, 인동초, 익모초, 느릅나무, 돈냉이, 미나리 등
몸에 좋다는 것은 모두 먹었다.
아마 이 년 동안 몇 차는 먹었으리라.
6개월 월을 주기로 검사를 한 결과,
암 조직이 성장을 멈추고 조금은 작아진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이다.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독한 것을 몇 차나 먹었는데, 그놈은 죽었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는 경로당에 가끔은 놀려 가서는
다 나았다고 주위 친구 분들에게 말씀하신다.
사실은 말이지만 암이란 이렇게 해서 완치될 것이면
누가 병원에 가겠는가.
집안에서 편안하게 보내면서 투병 생활을 하지 말이다.
현대의학으로도 잘못 고치는 난치의 병을
아무것도 아닌 민방으로 고친다는 것은
나로서도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정성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운명을 하늘에 맡긴 체 말이다.
당신 자신이 살아야 겠다는 의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잊지 않았다.
항상 긍정적인 생각과 좋은 마음가짐을 가지시라고 하면서.
얼마 전의 일이다.
새벽에 어머니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이상하시다고 말이다.
며칠 전부터 아파서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있다고.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먼저 스친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과
아버지의 고통스워 하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다행히 동생이 일찍 시골에 도착해
밀양의 병원으로 모시고 위내시경과 조직검사를 받았다.
의사의 말로는 암의 징후는 보이지 않으나
정확한 결과는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는
며칠 후에 가봐야 알 것 같다고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분명히 큰 병원에서의 조직검사에서도
암이라는 판명이 났는데
암의 조직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혹시 잘못 검사를 내린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어 재차 질문을 하였으나 암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의심스러우면
큰 병원에 가서 다시 한번 정밀검사를 받아 보라 한다.
소견서와 내시경 검사 사진을 복사해 주면서.
그렇다면 그렇게 아픈 것은 암과는 무관하단 말인가.
이상하다 분명히 암환자는 최후에 고통이 오는데
그것이 아니란 말인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음식을 잘못 먹어서 체했거나
식중독 증상이었던 것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 이상 없이 잘 지내고 계시다.
난 의사의 말대로 소견서와 사진을 가지고
부산의 동아대병원에 가서
최종 결과를 보기로 하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날이 9월 중순이다.
우리 가족들은 그날이 오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갈망하고 있다.
정말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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